[세기와더불어 독후기(48)] 제7장 인민의 세상 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이 절은 제목인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에 잘 드러나 있듯이, 유격구의 정권형태를 쏘베트 건설 노선에서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으로 전환하는 방향전환을 다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유격구의 정권형태에 대해 기존의 쏘베트 건설 노선을 반대하고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을 제안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과 그 시책은 훗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으로 이어졌으며, 해방 후 수립된 북 인민정권의 맹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7)] 제7장 인민의 세상 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를 이끌고 요영구에서 소왕청으로 이동하였다. 소왕청은 같은 왕청현에 속하지만 요영구보다 남쪽에 위치해 있어 조선의 육읍지구와 가까웠다. 국내진출에 유리한 위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반일인민유격대의 국내진출에는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어 있었다. 바로 교조주의와 사대주의 때문이었다.교조주의는 선행한 맑스주의 이론이나 러시아혁명의 경험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사조를 말한다. 당시 동만의 열성 공산주의자들과 동만특위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6)] 제7장 인민의 세상 1. 보금자리1933년 2월 중순 반일인민유격대는 마로인의 안내를 받으며 라자구 등판을 넘어 왕청유격구에 입성하였다. 왕청은 간도의 여러 현들중에서도 일찍부터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곳이었다. 백전노장 홍범도가 일본군 토벌대를 대패시킨 전장도 여기에 있었고 서일, 김좌진, 리범석 등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활동기지도 이곳에 있었다. 리동휘는 이 일대에서 독립군 인재양성에 심혼을 바쳤다. 독립군의 맹활약과 독립운동자들의 출몰은 이 지방 인민들의 민족적 각성을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5)] 제6장 시련의 해 8. 라자구 등판에서소사하의 가을이 깊어가는 중에 일본 군대의 안도입성은 시간문제로 되고 있었다. 구국군은 안도현을 떠나 왕청현과 동녕현의 경계에 위치한 라자구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반일인민유격대도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구국군과 함께 안도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최총적인 목표는 왕청으로 활동거점을 옮기는 것이지만 당분간은 퇴각하는 구국군 부대들이 집결되고 있는 라자구에 자리잡고 거기서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였다.중국인 반일부대인 구국군은 동녕현에서 쏘련 경내로 넘어갔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4)] 제6장 시련의 해 7. 소사하의 가을반일인민유격대 지휘부는 량강구에 돌아오자 소사하에서 남만원정에 참가하지 않은 나머지 인원들까지 모두 불러다가 유격대가 창건된 후 반년 동안의 사업을 평가하였다. 주되는 내용은 남만원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유격대원들은 반일인민유격대가가 반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성장 발전하였고 그 과정에 유격전으로써도 능히 일제를 타승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는것을 한결같이 인정하였다.평가회의에서는 유격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전환시키기 위한 세 가지 과업이 다음과 같이 제기되었다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3)] 제6장 시련의 해 6. 구국군과 함께류하에서 독립군과의 합작을 이룬 반일인민유격대는 해룡을 거쳐 몽강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군사정치활동을 벌렸다. 몽강에서 벌린 활동의 총적 목표는 무장을 해결하는 것과 대열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정치공작과 함께 군사외교활동이 필요하였다.몽강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데 몇 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몽강의 관리들 가운데는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의 김일성의 동창생들이 많았다. 공부만 하던 샌님들이 9.18사변 이후 자위군에 들어가 한자리씩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2)] 제6장 시련의 해 5. 단합의 리념아래통화에서 벼락같이 철수한 김일성의 반일인민유격대는 류하를 향해 행군을 다그쳤다. 류하는 남만 일대에서 흥경, 통화, 화전, 반석과 더불어 조선독립운동의 중요한 책원지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이 지방에는 구세대의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새 세대의 투사들도 많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에서 첫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도 남만의 류하현에 속한 하니하라는 곳에서 설립되었다.김일성이 류하를 행군 노정의 하나의 목표로 정한 것은 이 일대에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1)] 제6장 시련의 해 4. 합작은 불가능한가?안도-무송현경 전투를 치른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를 인솔하여 량세봉 사령의 독립군이 있는 통화로 행군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인 량세봉 사령의 독립군과 합작을 하기 위함이었다. 량세봉 사령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선생과 살아생전에 친분이 두터웠다.량세봉은 3.1운동 전야에 고향인 평안북도 철산을 떠나 남만의 흥경현으로 이주하였다. 3.1운동 이후 흥경현에서 김형직 선생은 량세봉을 맨 처음으로 만났다. 그 당시 그는 통의부에서 검무관으로 활동하였다. 정의부가 나온 다
통일선교의 걸림돌인 국가보안법과 한국교회의 과제기독교 사상과 국가보안법국가보안법의 전신은 보안법이다. 보안법은 1907년 제정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2년 뒤인 1907년에 체결된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입법권마저 상실하게 된다. 정미7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입법되는 5대 악법(보안법, 신문지법, 출판법, 사립학교령, 학회령)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악법 중의 악법이 바로 보안법이다. 보안법의 목적은 천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일제의 국체를 보전하기 위하여 식민지 조선의 불온한 사상을 규율하는데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0)] 제6장 시련의 해 3. 기쁨과 슬픔어머니 강반석 여사와 작별한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를 이끌고 계획대로 남만원정에 나섰다. 반일인민유격대의 남만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우사령 부대에서도 200명으로 편성된 부대를 통화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 부대의 인솔자는 김일성의 육문학교 은사 류본초 선생이었다. 우사령이 자기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류본초 참모장을 남만으로 보낸 목적은 당취오 자위군과의 합작을 실현하며 자위군을 통하여 무장을 해결하려는데 있었다. 류본초 선생의 제안에 따라 김일성은 구국군과 함께 남만으로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9)] 제6장 시련의 해 2. 마지막 모습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의 남만원정 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치고 있던 어느 날 동생 김철주가 찾아왔다. 어머니 강반석 여사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강반석 여사는 팔도구에서 살 때만 하여도 병상에 드는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무송에 와서 김형직 선생이 돌아가시고 김성주가 길림으로 중학공부를 떠난 다음부터는 종종 병환에 시달렸다. 여사는 안도에 이주한 다음부터는 위암으로 추정되는 가슴앓이로 고생하였다.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다음날 소사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8)] 제6장 시련의 해 1. 남만으로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난 다음 유격대원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유격대 활동의 행동방향에 대한 것이었다. ‘유격대’ 자체가 생소한 현실에서 유격대 활동에 대한 상을 잡기가 조련치 않았던 것이다. 이를 위한 토의가 소사하에서 열렸다. 100여명의 대원들이 유격전에 대한 개념도 각이하였거니와 지식정도와 생활경로, 소속단체가 다르다보니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었는데, 크게 보면 세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첫 번째 부류의 주장은 소조론이었다. 소조론이란 중대요, 대대요,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7)] 제5장 무장한 인민 5. 새 무장력의 탄생1932년 봄은 세계를 뒤흔드는 사변들로 하여 매우 소란스러웠다. 만주대륙을 강점한 일제는 손중산의 국민혁명에 의하여 밀려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내세워 괴뢰 만주국을 조작해냈다. 만주국의 군인을 위만군이라 한다. 일제가 만주국을 앞세워 위만군을 만들고 있을 때, 김일성은 새로운 무장력인 반일인민유격대를 건설하고 있었다.김일성은 3월 중순경에 안도에서 동만의 여러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소조의 지휘성원들을 위한 단기훈련(단기강습)을 조직하였다. 지방들에서 2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6)] 제5장 무장한 인민 4. 혈전의 준비명월구회의 참가자들은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할데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김일성(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김성주는 본명 대신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불렸다.)에게 이 사업에서 선구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무슨 일이나 표본이 있고 시범이 있는 법이고, 김일성이 유격전을 기본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안의 첫 제안자이니만큼, 먼저 표본을 만들어 시범을 보여달라는 요구였다.김일성은 명월구회의 이후 안도로 갔다. 그는 무장대를 조직
“북 인문학, 사람을 중심으로 진,선,미를 꿰어내다” 통일시대연구원 이정훈 연구위원의 신간 『맑스주의를 넘어선 북 인문학의 새 지평』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북 인문학의 성취를 원문에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작동하는 분단체제에서 북 인문학의 논의를 생생한 원문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미덕이라 하겠다. 저자가 서초동에 소재한 국립중앙도서관 5층의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얼마나 발품을 팔았을지 우선 그 들인 공력에 경의를 표한다. 주체철학에 기초한 북의 인문학은 서구 인문학에 포섭된 남의 인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5)] 제5장 무장한 인민 3. 무장에는 무장으로김성주는 9.18사변이 나자 항일전쟁을 시급히 개시해야 할 절박한 과업이 나서게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부정의의 포성에 정의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왔다고 본 것이다. 그는 무장투쟁에 앞서 간도지방에서 추수투쟁을 조직하였다.김성주가 무장투쟁에 곧바로 진입하지 않고 추수투쟁을 조직한 것은 첫째는 무장투쟁에 참여할 골간을 양성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함이었고, 셋째는 유격대가 의거할 대중적 지반을 축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4)] 제5장 무장한 인민 2. 9.18 사변김성주는 1931년 5월 20일 《봄명월구회의》이후 1931년 여름과 초가을 화룡, 연길, 왕청일대의 지방조직들에 나가 5.30폭동 후 흩어졌던 대중을 묶어세우는 사업을 하였다. 그가 돈화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안도, 룡정, 화룡, 류수하, 대전자, 명월구 등지와 연계를 맺으면서 사업을 한창 전개해나가고 있을 때 9.18사변이 터졌다.9.18사변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밤 심양 북대영 서쪽 류조구에서 일본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3)] 제5장 무장한 인민 1. 수난당한 대지김성주는 1931년에도 간도일대에서 5.30폭동의 후과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을 근기있게 해나갔다. 카륜회의 방침을 관철하는데서 첫째가는 장애가 바로 이 폭동의 후유증이었다. 이 장애를 시급히 제거하고 혁명대오를 재정비하지 않는다면 위기에 처한 혁명을 건질 수도 없었고 심화발전시킬 수도 없었다.김성주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의 과제는 5.30폭동의 후과를 총화하는 것이었다. 폭동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동만에는 아직도 광신적인 테러주의자들과 리립삼 노선의 신봉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2)] 제4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10. 잊을수 없는 사람들 김일성 주석이 평양에서 쿠바의 카스트로를 만났을 때, 그가 무장투쟁을 하면서 식량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김일성 주석은 그에게 적의 식량을 빼앗아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인민이 시종일관 우리에게 식량을 대주었다고 말했다. 회고록 제4장 10절은 이처럼 항일민족해방운동을 지지성원한 인사들을 회고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할 때부터 조선인민혁명군에 이르기까지 인민이 밥을 먹여주고 잠자리를 마련
[세기와더불어 독후기(31)] 제4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9.《리상촌》을 혁명촌으로 한때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은 《리상촌》건설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민족주의자들이 제창한 《리상촌》건설에 대한 주장은 만민이 유족하고 화목하고 평화롭고 오붓하게 살아가려는 조상들의 지향과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리상촌》건설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 인물은 안창호였다.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된 직후 중국 청도에서는 안창호, 리동휘, 신채호, 류동열 등이 모여 회담을 벌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