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34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34. ‘사후 조작’은 계속 진행 중

‘1983 버마 사건’을 포함해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일어난 4건의 국가조작 테러는  어쩌면 더러운 세계 공작사에서는 길이 남을 금자탑일지도 모른다. 이들 사건은 미국이 유지하고 지탱하는 남북 분단체제를 굳건히 다졌고, 이를 통해 미국은 1975년 베트남전 패퇴의 굴욕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열 수 있었다. 그렇게 극악무도할 정도로 공격적인 미국의 대소대북 전략은 급기야 소련 해체로 이어졌다. 이후 세계는 미국이 횡포하는 1극체제로 재편되면서 세계 약소국 인민의 불행은 날로 깊어졌고, 남북 분단체제는 난공불락의 요채처럼 돼 버렸다.

그 책임을 조선(북한)에게 뒤집어씌운 이들 사건의 내막이 드러난다면 미국과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유지 보수해 온 남북 분단체제는 심하게 요동할 것이고, 거창한 미국식 자유민주적 세계질서도 흔들릴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이런 세기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사후 조작’에 힘을 쏟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사후 조작의 요체는 어리바리한 국민들의 - 또는 세계 시민들의 - 뇌리에 끊임없이 거짓 정보를 투여하면서, 이 사건의 실체를 의심하는 이들의 입을 막는 것이다.  저들이 더 힘을 쓰는 것은 전자일 것이다. 이미 일해재단을 통해 유가족들을 지원하고 감시하면서 피해 당사자들의 의혹 제기를 원천봉쇄한데다, 제3자가 사건의 실체를 의심할 계기도 없었기 때문이다(『1983 버마』는 이런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의 소산이다.) 

거짓 여론을 조작하는 데는 언론과 출판,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수단이 동원되며, 공식 외교문서를 조작해 이를 국가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포함된다. 외교문서를 조작해 국가기록화한 사례가 드러난 것은 우습게도 2017년 4월 난데없이 국정원이 기밀 해제 문건을 언론에 공개한 덕분이다. 사건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버마 판사의 딸을 이북 공작원이 일본에서 살해했다(했을 것이라)는 ‘뉘앙스’의 문건이었다.   

 

( 기밀 해제 문건)

[북한이 아웅산 테러범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의 딸 피살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당시 우리 정부가 포착한 사실이 ...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강조]1986년 12월 이상옥(李相玉) 당시 주제네바 대사는 주제네바 미얀마[버마] 대사와 만난 뒤 작성한 2급 비밀문서에서[강조] “아웅산 테러 사건 재판에 관여했던 판사의 딸이 약 1년 반 전[1985년 6월 경] 일본 유학 중 변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어 “현장에서 북한제 담배꽁초가 발견됐으며 자살할 만한 특별한 동기도 없어 사인 규명에 노력했으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 아웅산 테러 담당 판사의 딸이 일본에서 살해된 시점은 1985년 6월께로 ...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인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주제네바 미얀마 대표부에 폭탄 장치를 설치했다는 협박 전화가 걸려와 직원들이 대피하고, 경찰이 건물을 수색하는 소동이 일기도 ... 수색 결과 폭발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북, 아웅산 테러사건 담당 판사 딸 살해 의혹 - 현장서 북한제 담배꽁초 발견됐지만 진상 못 밝혀」<연합뉴스> 2017.4.11 / 이런 너절한 ‘국가기밀문서’가 공개된 시점은 문재인 정부 공식 출범 한 달 전이고, 필자의『1983 버마』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간 지 두 달 뒤였다.)

우선 ‘북한제 담배꽁초’. 범행 현장에 내가 범인이요 하고 증거물을 남기고 갔다는  이야기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1973년 8월 이후락의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김대중 씨를 납치해 올 때 사건 현장에 이북 담배 ‘백두산’을 놓고 온 것과 같은 수법이다. 

버마 판사의 딸이 일본에서 살해됐다는 이야기는 사실일까. 진위를 단언할 수 없지만, 1985년 6월 경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 신문과 방송이 나발을 불어댔을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면 사건은 지어낸 이야기일 공산이 크다. 그때는 명실상부 ‘조작의 시대’였다.

1985년 2월 안기부장이 된 장세동은 북측의 대남 대화 제의를 수용하는 척 하면서 아웅 산 묘소 사건을 북측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려 획책했다(『1983 버마』제6부 <전두환 정권의 남북회담 속셈과 ‘간첩선 공작’> 참조. 장세동의 안기부는 또 1987년 1월 ‘수지킴 사건’을 조작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진실의 길> [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8, 2020.12.17 참조.
http://poweroftruth.net/news/newsView.php?table=byple_news&uid=5061)

이때는 또 ‘국제적 언론 프락치’(싱 후 쿠오)가 안기부 문건을 토대로 쓴 책이『아웅산, 피의 일요일』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여기저기 배포될 때다(앞글 33편). 이처럼 전두환네가 - 또한 미국이 - 아웅 산 묘소 사건으로 조성한 반북적대 분위기를 이어가려 혈안이 돼 있을 때, 북측은 어떻게든 남북관계를 호전시켜 보려 애쓰고 있었다. 1984년 9월 남측이 수해를 당하자 비축물자까지 풀어 보낸 뒤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대화의 물꼬를 터 보려 안간힘을 쓸 때다. 이때 버마 사건 담당 판사의 딸을 살해해 아웅 산 사건의 악몽을 되살리려 했다면, 그것이 남과 북 둘 중 하나의 소행이라면, 그것은 100% 전두환네 짓이어야 한다. 아니 그런가?
(* 어떻게든 남북관계를 잘 풀어보려는 쪽은 늘 북쪽이었고, 핵이니 미사일이니 인권이니 떠들어가며 어떻게든 남북관계에 어깃장을 놓는 쪽은 항상 남쪽과 미국이었다. 부끄럽게도 이는 70년 분단사가 증명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그런대로 예외라 할 수는 있다.)

이 시점에 이상옥 스위스 주재 대사가 얼토당토않은 문건을 본국에 보냈다면, 이는 버마 네 윈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사후 협잡임에 틀림없다. ‘1983 버마 사건’ 당시 외교부 제1차관보였던 이상옥은 그 해 10월 28일부터 11월 9일까지 버마를 방문해 버마 외무차관보 등을 만났다.

버마 정부가 10월 17일 중간 수사 결과에서 “코리언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이에 놀란 전두환네는 다음날인 10월 18일 안기부 대공수사국 국장(성용욱. 훗날 감사원 사무총장. 국세청장)과 과장(한철흠)이 버마로 급파했다. 이상옥 차관이 버마에 간 때는 안기부 대공수사국장과 과장이 10월 25일부터 강민철을 만나 “서울에서 왔다”는 말을 번복하도록 집요하게 설득할 때다. 아마도 강민철을 보냈을 이들이 직접 그를 만나 설득하는 동안 이 차관보는 버마 정부와 접촉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버마로 온 지 사흘째인 10월 31일 버마 정부의 입장이 남측으로 기울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0월 31일 모처럼 좋은 소식 ... 버마 대사대리인 송영식(宋永植) 참사관이 버마 외무부 아-태과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사건 직후인 10월 14일 버마 당국이 북경 주재 버마 대사이며 북괴 겸임 대사인 우 옹 신을 소환, 축산어업차관으로 발령 ... 북괴에 대한 외교적 조치인지에 대해 ... 버마 측은 함구 ... 다만 “수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대답했다는 전문 보고 ... 버마 정부는 이때 이 사건에 대해 북괴의 신문.방송 보도를 정리해 보내달라고 우리에게 요청 ... 북괴 측과는 상대 않겠다는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지루한 기다림... 어려운 결단 26일」<조선일보> 1983.11.5)

 

( 조선일보 1983.11.5)

이상옥 차관보의 버마 행적은 더 이상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역시 사건의 책임을 이북으로 몰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1986년 9월 스위스 대사로 나간 지 3개월 만인 “1986년 12월 주제네바 미얀마[버마] 대사와 만난 뒤” 문제의 ‘2급 비밀문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낸 것이다. 이때 스위스 주재 버마 대사는 놀랍게도 ‘1983 버마 사건’ 당시 버마 정무총국장으로 전두환네와의 소통 창구였던 아웅 틴 툰이었다. 아웅 산 묘소 사건의 대버마 협잡 창구였던 이도 마침 스위스 대사로 가 있었던 것이다.

틴 툰과 이상옥 대사가 문제의 비밀 문건 작성이나 송신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물론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1983 버마 사건’을 조작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들이 네 윈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 동시에 차근차근 마련됐다는 사실, 이 사건은 두 나라 정권을 동시에 움직인 ‘큰 손’의 작품이라는 필자의 주장을 상기하면 스위스에서의 모종의 ‘사후 협잡’을 추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다음, 언론과 출판 및 영화 등 문화적 수단을 통한 사후 조작의 경우를 보자. 사건 발생 후 신문과 방송은 남북관계가 어그러지거나 어그러뜨릴 필요가 있을 때마다 ‘북한의 소행’ 운운하며 이 사건을 모름지기 수천 번은 언급했을 것이다. 그렇게 국민들의 뇌리에 ‘이북=악마’라는 등식을 심었던 것이다. 사건 발생 5.10.15.20.25.30주년이 되면 기자들에게 유가족들의 연락처와 신상 정보를 주며 ‘악랄한 OOO’ ‘OOO정권’ 운운하는 인터뷰를 이끌어냈다.

출판을 통한 사후 조작은 앞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방의 언론 프락치’임이 분명한 싱 후 쿠오의『아웅산, 피의 일요일』(1984, 번역 1985)을 위시해, 실존 인물인지조차 불명확한 ‘미국의 테러전문가’ 조셉 버뮤디스의『북한과 테러리즘』(1991),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거물급 한반도 전문가로 행세하던 돈 오버도퍼의『두 개의 코리아』(1997)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사건 당시 또는 사후에 정부나 기관에서 일했던 이들의 회고록 또는 사건 관련 기록들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는 사후 조작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사건 당시 장세동 경호실장의『일해재단』(1995), 노신영 총리의『노신영 회고록』(2000), 송영식 버마 참사관의『나의 이야기』(2012),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전두환 회고록』(2017), 최병효 외무부 서남아과 서기관의『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2020), 훗날 국정원 차장을 지낸 라종일의『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2013) 등이 대표적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는 ‘대중적 사후 조작’에서 더없이 중요한 수단이다. TV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 유독 SBS의 활약상이 눈에 띈다. 2011년 수목 드라마 ‘시티 헌터’에서 이 사건을 중요 소재로 다루더니, 최근에는 이런저런 ‘딴따라 역사 프로’를 만들어 이 사건 홍보에 앞장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꼬꼬무)’ ‘당신이 혹하는 사이에(당혹사)’ 등이 그것이다.
‘시티헌터’의 오프닝을 장식한 아웅 산 묘소 폭파 장면은 실제로 다량의 폭탄을 사용해 실감나게 제작됐고, 이 장면은 두고두고 SBS 프로에서 ‘실감나는 북한의 테러’를 반복 세뇌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 당혹사 진행자 변영주 감독. 그는 4월 16일 방송에서 필자가 만든 찌라시과 필자의 책을 슬쩍슬쩍 언급하다 종국에는 필자의 견해를 음모론으로 폄훼했다. 그를 포함한 출연진의 언동은 흡사 영화 ‘풍문조작단’의 광대들을 연상시켰다. 변 감독의 지인은 그가 단지 방송사에서 써 준 원고대로 방송을 진행했을 것이라며, 방송 내용에 대한 항의는 방송사 측에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입장을 표시했다. 유튜브 축약본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Y9xRlEnTWPY2022. 4. 16)

영화는 최근 개봉한 이정재 프로덕션의 ‘헌트’가 유일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씨의 회사가 2016년부터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려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6년여가 지난 올해 영화를 출시했다는 점이다. 2017년 초에는, 최민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며 제목은 ‘남산’으로 정해졌다는 뉴스도 있었다. ‘남산’은 ‘쉬리’ ‘베를린’ ‘백두산’ 등의 계보를 이어, 어떻게든 이북을 악마화해 남측 주민의 대북 적의를 고조시키려는 ‘영상 공작’이 분명해 보였다.

6년여의 곡절 끝에 출시된 ‘헌트’의 플롯은 국정원 직원들 간 암투가 주축으로, 아웅 산 묘소 사건은 작은 에피소드로 축소됐지만, ‘영상 공작’에 대한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개봉에 즈음해 버마 사건을 이북의 소행으로 재규정하는 수상한 글들이 인터넷 공간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네이버와 구글에 올라 온 ‘헌트’ 영화평의 일부)

이 사건을 조작했고 사후 ‘영상 공작’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계속 은폐해야 하는 축에서 영화평을 가장해 ‘1983 버마 사건’을 집중 조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현대사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인 극악했던 1980년대 전두환 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각하를 모시는”(정우성 대사) 안기부 직원들끼리 죽기살기로 싸우는 플롯부터가 괴상하다. 그런 플롯에다 아웅 산 사건을 이북의 소행으로 기정사실화하는 장면을 억지로 끼워넣어 어색해졌다. 이런 괴상함과 어색함 역시 ‘영상 공작’의 잔영일 것이다.

앞으로도 조작은 계속될 것이다. 이땅의 분단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저들은 앞으로도 갖은 수단을 동원해 ‘1983 버마 사건’을 이북의 소행이라고 반복해 복창할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 제작비를 지원할 수도 있고, 여타 관련자들을 내세워 회고록이나 사건 관련 책을 더 출간할 수도 있다. 정부 관계자로서 사건 당시 버마에 있었거나, 사후에 버마 대사관에 근무하며 사건 은폐에 관여했을 이들 몇몇이 아직 책을 쓰지 않았다.

이들이 책을 쓴다면 십중팔구 이 사건을 이북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누가 무슨 책을 쓰든 필자의 책『1983 버마』가 나온 이상 이 사건의 진상을 덮을 수는 없다. 지난 5년 동안 글이든 말이든『1983 버마』의 논지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전두환네와 미국의 자작극’ 결론을 부정한 이는 없었다. 최 전 대사나 변 감독네 광대패처럼, 또는 이들 뒤에서 각본을 써 주는 자들처럼, 책 내용과 논지는 도외시한 채 둘러대기 편한 말로 “음모론이야”라고 떠들 뿐이다. 결론을 부정하려면 논지를 반박해야 하는데 논지를 반박할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혹시, 누군가 전두환 패거리나 그 추종자들이 떠드는 ‘이북 소행 각본’을 약 100배로 확장해 사건의 전개 단계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이어붙이면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려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 새로 확인됐다거나 미국에서 새로운 기밀문서를 공개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낸다면『1983 버마』논지와 자작극 결론을 - 당분간은 - 무색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어느 간담회에서 120명의 이북 무장공비가 쳐내려왔다는 울진삼척 사건(1968년 10-12월)을 조작이라고 강론했다(실은 이런 주장을 오래 전부터 해 왔다). 이 이야기가 조작일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를 댔다. 우선 이북 특수부대원 120명이 내려와 113명이 죽고 7명이 체포 또는 자수했다는 정부와 학계 및 언론계의 ‘공식 해설’의 허구성. 120=113+7 이라는 수식은 동서고금 어떤 게릴라전에서도 적용될 수 없다. 특수전 게릴라 120명이 총칼 들고 내려왔는데 전원이 몰살 또는 체포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또 이남 군.경.예비군이 사살했다는 113구의 시신 행방에 대해서도 반세기가 지나도록 어떤 언급도 없었고 사진 한 장 공개되지 않았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말이다.(*같은 해 1월의 ‘김신조 사건’ 사망자 약 20여명의 시신은 파주 적성군 묘지에 묻혀 있다. 필자는 김신조와 이들 사망자의 정체를 의심한다.)

이렇게 말하니 교수라는 어느 청중이 “120명 공비 중 70명이 북으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한국현대사에 깊은 생채기를 낸 이 엄청난 사건에 웬 금시초문! 기절초풍할 뻔했다. 120=113+7이라는 수식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에 듣도 보도 못한 120=70+50이라는 새로운 수식을 들이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어디서 나온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은 이미 그렇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완전히 새로운 울진삼척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심산이다.

‘1983 버마 사건’에 대한 “이북 소행” 일변도의 주장은, 또 다른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인 ‘1987 KAL 폭파 테러’에 사건에 대한 같은 논란과 함께, - 또한 KAIST 박사들을 대거 동원해 천안함 좌초를 이북 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로 조작한 것과 함께 -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과학적 탐구와 역사 연구의 깊이가 얼마나 천박한지를 웅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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