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말하여, 김일성 주석은 인민대중을 경시하고 천시했던 부르조아민족주의 상층부의 잘못된 길을 떠나 청년학생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지도하며 청년학생대중의 힘, 인민대중의 힘에 직접 의거하여 혁명투쟁을 벌여나가는 새로운 발걸음을 통해 사람,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 정대일. 철학박사(주체사상 연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사회선교사(평화통일분야).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실장.

[세기와더불어 독후기] 2장 잊을 수 없는 화전 4. 새로운 활무대를 그리는 마음

화성의숙에서는 학교 운영자금의 부족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의숙의 학생 수가 100명도 채 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독립군 형편에서 그만한 학생들을 먹여살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의부가 주인이었지만 돈을 넉넉히 대주지 못하였다. 백성들한테서 한푼 두푼 모은 군자금으로 행정, 군사, 민사의 세 가지 틀거리를 다 갖추고 한 개 국가와 맞먹는 허울을 가까스로 유지해나가는 정의부로서는 돈을 크게 대 줄 처지가 못 되었다.

화성의숙 당국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학교 운영자금 모금사업에 주기적으로 동원시켰다. 학생들은 20명이 한 조가 되어 자기의 출신 중대에 돌아가 무기를 받아가지고는 두 달 동안씩 정의부 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자금을 모으다가 기한이 되면 다른 조와 교대하곤 하였다. 그렇게 돈을 모았대야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금방 바닥이 나곤 하였다. 그러면 또 길림에 올라가서 정의부에 손을 내밀었다.

이런 와중에 학교 운영자금에 대한 횡령사건이 일어났다. 3중대장이 모금된 학교 운영자금을 자기 결혼식 비용으로 써버린 것이다. 이에 분개한 김성주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하여 3중대장을 비판하였다. 이는 . 를 조직한 후 민족주의자들에게 가한 첫 비판이었다.

김성주는 민족주의자들의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인민관, 즉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백성들을 순전한 납세자, 돈을 대주고 쌀을 대주고 잠자리를 대주는 시중군들로 밖에 보지 않았다. 이런 관점은 지난날 봉건사회의 관료배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근본적인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행과 부패가 일어났다고 진단한 것이다.

인민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 기초한 독립군은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자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며 대변하는 부르조아민족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한 독립군은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힘을 가질 수 없었다. 독립군 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운동 일반에 대한 실망과 함께 화성의숙의 교육에 대한 환멸은 날이 갈수록 김성주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 올랐다.

김성주는 맑스ㅡ레닌주의 사상에 심취되면 될수록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져갔고,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헤어날 수 없는 고민의 세계에 빠졌다. 이런 복잡한 심리적 곡절 끝에 그는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김성주가 화전 대신 길림을 자기 운명의 다음 정거장으로 선택한 것은 이 도시가 만주지방에서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김성주는 화전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광활한 무대로 나가 . 의 결성으로 첫걸음을 뗀 공산주의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벌려보고 싶었다. 이것이 그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게 된 기본이유였다. 그가 화성의숙을 다니다가 반년 만에 중퇴하고 길림으로 간 것은 생애 처음으로 되는 일대 용단이었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청년학생들속에 들어갈 용단을 내린것이 정당한 처신이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화성의숙을 제때에 떠나지 않고 그 울타리속에서 맴돌았더라면 그이후 조선혁명을 급속한 앙양에로 승화시킨 모든 공정들이 그만큼 지연되였을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화성의숙을 떠난 뒤 30년이 지나 평양에서 해후하게 된 최동오 숙장은 결국 그때 성주수상이 정당했습니다!라고 감회 깊게 인정하였다.

길림으로 가기 전 어머니가 계시던 무송에 들른 김성주는 무송시내와 그 일대의 애국적인 소년들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때가 19261215일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19261226일에는 . 와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한 경험에 토대하여 어머니를 도와 반일부녀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당시 강반석 여사는 남편 김형직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무송현성 안은 물론, 멀리 주변 농촌의 넓은 지역에까지 다니며 도처에 야학을 내오고 조선여성들에게 우리 글을 배워주고 그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 있었다.

무송에서의 조직사업을 마친 김성주는 김시우 총관이 길림에 있는 김사헌 선생에게 보내는 소개신을 받아 길림으로 떠났다. 김사헌 선생 또한 김형직 선생의 친우였다. 김시우는 민족주의 진영을 떠나 공산주의 운동에로 떠나가는 김성주를 마지막까지 도와주고 다리를 놓아줌으로써 방향전환 사상의 은사였던 김형직 선생에게 의리를 다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화전의 화성의숙을 떠나 길림의 청년학생 대중들 속으로 들어간 김일성 주석의 발걸음은 향후 주체사상을 창시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했던 경험을 쌓게 되는 결정적인 발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김일성 주석은 인민대중을 경시하고 천시했던 부르조아민족주의 상층부의 잘못된 길을 떠나 청년학생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지도하며 청년학생대중의 힘, 인민대중의 힘에 직접 의거하여 혁명투쟁을 벌여나가는 새로운 발걸음을 통해 사람,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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