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말하여, 김일성 주석의 사상과 노선에는 한 사람의 계급적 처지와 출신성분이라는 객관적 요소를 중심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혁명적 요구와 그에 기반한 혁명사상을 중심으로 놓고 사람을 평가하는 ‘사상중심의 사람론’이 관철되고 있다고 하겠다.

저자: 정대일. 철학박사(주체사상 연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사회선교사(평화통일분야).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실장.

[세기와더불어 독후기] 3장 길림시절 2. 상월선생

 

김성주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선생이 박소심이라면 고리끼의 어머니홍루몽을 소개해준 사람은 상월선생이었다. 상월선생은 육문중학교의 어문교원이었다. 상월선생이 부임된 때는 만주지방의 군벌 장학량이 장개석의 지령에 따라 만주땅에 국민당 깃발을 날리며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적발하고 탄압하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밀정들을 박아넣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혹시나 상월선생이 국민당 특무가 아닌지 경계하고 있었다.

상월선생은 단 한번의 강의로 학생들의 경계심을 해소시켜주고 인기를 독점하였다. 그는 120회에 달하는 홍루몽의 방대한 줄거리를 한 시간 사이에 다 소화시켰다. 본질을 추리고 거기에 중요한 생활장면들을 끊임없이 섞어가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솜씨가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학생들은 그 소설이 가지고 있는 생리와 가부장적 전통이 지배하는 한 귀족 가문의 조락 과정을 순간에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상월선생이 수업을 끝내고 교실에서 나가자 학생들은 육문중학교에 보배가 굴러들어왔다고 하면서 환성을 울렸다.

사실 상월선생은 공산주의자였다. 상월선생은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지도하다가 국민당 반동군벌에게 체포된 선생은 절강성 육군 감옥에서 1년 남짓하게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후 그는 조선인 군의의 도움으로 보석 출옥한 후 사중무라는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만주지방에 와서 초도남이란 사람의 소개를 받아 길림육문중학교에 입직한 것이다.

상월선생은 길림에 온 후 중국공산당과의 조직선이 끊어진 상태에 있었지만 고리끼, 노신 등 진보적 작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그것을 해설하는 계몽식 강의를 여러 차례에 걸쳐 하였다. 언제인가는 비밀독서조 성원들의 제의를 받고 학교 도서실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자는 제목으로 한 주일 동안 특별강의를 해주었다. 이 강의를 받은 학생들의 반영이 대단히 좋았다. 이처럼 상월선생은 길림육문중학을 중심으로 한 김성주의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이다.

상월선생의 식견은 김일성 주석의 사상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월선생이 김성주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사상을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할 데 대한 견해였다. 이러한 견해를 나누게 된 계기는 앞서 소개한 홍루몽 강의 이후 홍루몽의 작가인 조설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는 김성주의 부탁으로 시작되었다. 상월선생이 홍루몽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면서도 그 소설을 창작한 작가에 대해서는 적게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상월선생은 시간의 부족으로 하여 작가의 경력은 생략하고 지나갔는데 김성주가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조설근의 생애와 집안 내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상월선생의 설명이 끝난 다음 김성주는 그 자리에서 작가의 출신과 작품의 계급적 성격 간의 상호관계를 두고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상월선생은 그 질문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선생은 자기의 개인적인 소신이라고 전제를 두면서 작가의 출신이 작품의 계급적 성격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성격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요인은 출신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말하였다. 그 실례로 그는 바로 조설근을 들었다. 그가 강희제의 특별대우를 받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지만 붕괴기에 있는 봉건 중국의 내막과 그 멸망의 불가피성을 형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은 것은 세계관이 진보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상월선생의 이러한 견해는 맑스주의 유물론에 대한 교조적 해석을 벗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작품의 성격을 규정하는 절대적 요인을 작가의 출신성분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 즉 사상에서 찾는 상월선생의 견해는 훗날 김일성 주석이 사상을 중심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사상을 창시하는 데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사상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견해를 세우게 되자, 다양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김성주와 상월선생은 사상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으며, 해당 문제들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진독수에 대한 평가문제였다. 진독수는 중국 공산당 창건자의 한 사람이며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 진독수는 중국의 농민들을 경시하는 기회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벌써 1926년에 농민은 중국의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기본역량이며 노동계급의 가장 주요하고 믿음직한 동맹군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진독수는 농민을 경시하였다. 그는 농민이 토호 출신들과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농민이 행정을 간섭하는 것과 농민의 적극적인 자위를 반대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농민투쟁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진독수의 오류는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구실 밑에 농촌혁명을 반대하면서 부르죠아지가 혁명전선에서 떨어져나갈까봐 두려워한데 있다. 그의 투항주의적 노선은 오히려 혁명에 대한 부르죠아지들의 배신을 조장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진독수의 사상적 편향에 대해 비판하는 가운데, 김성주와 상월선생은 농민문제에 대한 견해를 나누기 위한 장시간의 담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 담화과정에서는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에서 농민문제가 차지하는 위치의 공통성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이겠는가, 농민문제에 대한 레닌의 전략에서 참고할 점은 무엇인가, 농민이 혁명의 주력군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 이야기되었다. 김성주는 농사가 천하지대본인 것처럼 농민을 천하지대군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상월선생은 그 말을 긍정하면서 농민을 경시하는 것은 곧 농사를 경시하고 땅을 경시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이념을 가진 혁명을 하여도 실패를 면치 못하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진독수의 오류가 바로 이 이치를 망각한 데 있다고 부연하였다.

농민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인정하는 김성주와 상월선생의 견해는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적 해석에서 벗어나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이 처한 실정에 맞게 맑스주의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러한 창조성이야말로 김일성 주석이 진독수와는 다른 노선을 걷게 된 결정적 이유라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식민지 조선의 농민에 대한 판단에 있어, 그 계급적 처지의 소자산성에 주목하기보다는 민족적 억압과 봉건적 질곡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반제 반봉건에 대한 강렬한 요구와 그에 기반한 혁명사상에 대한 평가를 기본으로 하여 농민을 주력군으로 인정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판단에 기초하여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노선을 주창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김일성 주석의 사상과 노선에는 한 사람의 계급적 처지와 출신성분이라는 객관적 요소를 중심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혁명적 요구와 그에 기반한 혁명사상을 중심으로 놓고 사람을 평가하는 사상중심의 사람론이 관철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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