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학생행진은 어쩌다가 정치적 파멸의 행진을 하게 되었는가? 2

 

“맑스주의 전화”로부터 반공주의로 전화된 윤소영 교수 식 전화(轉化)

윤소영 교수는 파산한 알튀세르주의를 국내에 수입한 ‘맑스주의자’였다. 윤소영 교수는 ‘독점강화 종속심화론’이라는 피디이론을 만든 핵심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동유럽과 쏘련사회주의 해체 직후에는 《알뛰쎄르를 다시 읽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생각한다》(1992년)는 알튀세르 저작을 번역, 소개하면서 “맑스주의의 재구성”을 시도했다.

그런데 서구에서 스탈린 사후 흐르시초프 시절부터 유행이 된 ‘맑스주의 위기론’이나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가 해체되는 시기에 한국에 수입된 ‘위기론’이나 그 위기의 배경이 된 사회주의 약화와 해체가 실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부정한 결과라는 인식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위기론’은 유럽에서는 유럽혁명의 패배, 한국에서는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처럼 사회주의 운동에 조성된 난관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패배주의’와 정치적 상실감을 안고 만들어졌다. 따라서 쉽사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투항하거나 현실과 괴리된 사변적인 세계로 도피하여 자기위안을 삼는 것으로 출구를 찾았다.

전통적 계급투쟁 조직으로서의 당형태가 문제임을 인정하는 것

 

더욱이 우리는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문제에 독자성을 부여하는 또 다른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남북합작’ 형식으로 출발하는 ‘민족통일’의 구체적 진전이 대중정치의 일정에 올라 있는 현 상황에서 제기되는 ‘북한 사회주의’라는 체제적 현실, 또 그것이 남한 사회의 진보진영을 과잉규정하는 운동적 현실의 문제이다 ... ‘북한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은 해방 이후 한국에서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변질의 결과이며(이 때문에 그것은 또한 ‘매우 유별난 정통’이다.) 그 주요한 특징은 스탈린주의에서 기원하는 ‘민족주의의 극단화’와 ‘개인숭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건설된 ‘국가공산주의의 위기의 붕괴’가 ‘마르크스주의의 최종적 위기’와 ‘공산주의의 종언’의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윤소영/한신대 경제학 교수, “알튀세르를 다시 읽으며-‘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현재성”, [이론] 제1호, 2003-03-10)

알튀세르가 그랬던 것처럼, 윤소영 교수 역시 우선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맑스주의 전화(轉化)”를 실현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가 맑스주의에 그 기원이 있다고 보고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맑스주의 ‘정통’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면서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윤소영 교수는 ‘당형태’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공산주의’ 운운하며 사회주의를 포함해 ‘국가’일반과 현실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완곡한 표현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윤소영 교수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는 북에 대한 혐오와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윤소영 교수는 (전위)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적 지도와 사회주의 국유화 전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맑스주의의 핵심적 혁명적 원칙이 다 사라지고 무정부주의적, 신좌파적 ‘전화’가 시작됐던 것이다.

윤소영 교수가 2018년 3월 대학 수업 시간에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자발적인 매매춘”, “자발적으로 성 제공'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후 확인한 바로는 직접적으로 이러한 발언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날조하기 시작하면 망하는 거야. 위안부 할머니 아무런 근거가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 그 날조한 게 국내에서는 통하는데 해외에서는 안 통해”라며 위안부 문제가 날조라고 발언한 것은 사실이었다.

윤소영 교수는 “한일국교정상화를 가능케 한 양국간 조약을 훼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외교란 상대방이 있는 것이고, 특히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 있는 국가 간 관계를 규제하는 조약이 바로 국제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국제법을 위반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국교가 단절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민간인 피해 문제 때문에 그런 극단적 결과가 초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요”라며 공식 해명을 했다. 윤소영 교수가 박정희 시대의 ‘한일국교정상화’를 지지하고, ‘국제법’ 운운하며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역사적 문제 청산에 대해 식민지 근대화론자 수준의 극우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사회주의’라는 체제적 현실”이 “남한 사회의 진보진영을 과잉규정하”게 된 것은 가상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뿌리 깊은 반공 억압체제와 분단문제라는 현실의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다. 이를 ‘과잉규정’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남의 반공 억압체제와 분단문제를 외면하고 역사적 문제에 기권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에서 기원하는 ‘민족주의의 극단화’”라는 윤소영 교수의 주장은 한국사회 대다수 ‘좌파’가 민족문제, 민족에 대해 기권하거나 부정하고 있고, 쏘련이나 북의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 자력갱생의 문제를 “민족주의의 극단화”라며 ‘과잉규정’하는 인식과 같다. 이는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하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와 국제주의를 트로츠키주의적으로 대치시키고, 일국 단위의 변혁과 민족적 전통, 민족의 역사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해동포주의(코스모폴리터니즘)를 국제주의로 착각하고, 계급은 강조하되 민족은 부정하고, 특히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 일반을 부르주아 민족주의, 국가주의와 혼동하는 태도가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의 역사, 후과를 부정하는 윤소영 교수의 위안부 날조 망언을 낳았던 것이다.

더욱이 윤소영 교수의 이러한 정치적 태도는 이후에 점점 더 편향적으로 변하면서,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로까지 보고, 북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김정은의 3대 세습으로 백두혈통이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다는 것도 처참한 얘기다. 군주정이 부활한 것이다 … 노동자주의는 노동자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다 ... 얼마 전까지는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조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책도 쓰고 공적 발언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노동자들도 자기 행복이나 안위가 1차적인 관심이지 사회변화나 미래세대의 복지에는 관심 없다.”(“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주의 때문에 타락했다.”, [서경호의 직격 인터뷰], 중앙일보, 2018.05.11.)

이처럼 윤소영 교수는 노동자 투쟁을 매도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중앙일보에다가 “노동자주의” 운운하며 노동자와 노동자 투쟁을 경멸하고, 국가보안법의 논리로 “백두혈통”, “군주정이 부활”하니 하며 반공주의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극우 신문 중앙일보에 인터뷰를 하고 노조와 노동자들을 매도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다는 것도 처참한 얘기”다. 윤소영 교수는 봉건적인 ‘백두혈통’ 권력이 반제반봉건을 걸고 일제와 봉건적 억압을 척결하기 위해 싸웠던 빨치산의 혁명전통을 강조한다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제국주의 체제와 싸우고 사적소유가 철폐되어 지주와 소작관계가 사라지고, 토지와 산업이 국유화 되고 협동조합으로 조직된 나라가 ‘군주정’이라면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희한한 ‘군주정’이다. 그것이 ‘군주정’이라면 윤소영 교수야말로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희한한 ‘맑스주의 경제학자’ 아닌가? 결국 윤소영 교수는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극우 반공주의자 이문열로부터 진리를 구하겠노라며 자신의 지적파탄, 정치적 파탄을 만천하에 고백하게 되었다.

이문열의 『영웅시대』를 반공소설로 보지 않는다. 작가의 부친이 모델인 소설 속 주인공은 끝까지 공산주의에서 전향하지 않는다. 해방 정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박 겉핥기식 얼치기로 받아들인 지식인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경고한 것이다. 소설이 나온 게 1984년이다. 예술가의 본능적 감수성으로 80년대를 미리 걱정한 게 아닌가 싶다.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문열을 이해하기 위해 올 여름 그의 고향 경북 영양에 내려가 볼 생각이다.(중앙일보, 같은 기사)

경북 영양에서 극우 반공주의자 이문열과 극좌파 맑스주의자의 만남은 실현됐을까? 그 만남에서 어떠한 의기투합이 이루어졌을까? 뜨겁던 그해 여름이 자못 궁금하다.

사상적 타락으로 일치단결된 ‘사회진보연대’의 무정부주의적 ‘일괴암주의'

한국사회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알튀세르주의와 윤소영 교수의 입장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있는 단체다. 사회진보연대는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했다며 부정적이고, ‘당형태’ 운운하며 민주집중제, 즉 민주적인 토론과 철의 규율과 행동통일을 ‘일괴암주의'(一塊岩主義)’(하나의 단단한 바위덩어리)라고 비난하며 전위정당 노선을 비난하고 있다.

레닌주의의 정수는 전위당 사상과 PT독재이다. 그러나 당의 독재가 아니라 인민의 독재라는 레닌 본인의 사고와 4월 테제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은 당의 독재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스탈린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데, '당이 정치의 중심이자, 이론의 중심'이라는 스탈린적 편향을 낳을 수 있는 전위당 사상의 맹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는데, 첫째는 PT독재 하에서 정치의 중심인 당이 소비에트(평의회, 인민공사)를 억압할 가능성이며, 둘째는 스탈린적 편향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과학의 '정치 이데올로기화,' 즉 당에 대한 충성이 과학적 인식의 기준이 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과학적 성격을 억압할 가능성이다.(이현대 | 공동운영위원장, “당-좌파와 사회운동의 연합을 위하여 문제는 대중운동의 혁신과 재조직화다,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2007.10.78호)

여기서도 쏘련 역사를 실제적으로 인식하려는 태도는 없고 일방적으로 중상만 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겠다. 당과 대중조직은 어떻게 결합되고 동시에 구별되기도 하는가? 지도자와 인민대중, 당의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합될 수 없는가? “정치의 중심이자, 이론의 중심”이 아닌 당이 인민들을 지도하고 혁명권력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가? 당이 정치와 이론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부터 왜 당이 소비에트(평의회, 인민공사)를 억압할 가능성이 생기는가? 맑스주의 과학은 당파적인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성실하게 사회주의와 당에 복무하는 것을 비과학적 인식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회주의에서 당에 대한 충실도가 과학적 인식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는가? 착취와 억압이 철폐된 사회주의 사회에서 맑스주의는 오로지 비판적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데 자신들의 주장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했으면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현해야 해야 하고, ‘당형태’가 문제면 제대로 된 당적 내용을 가진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되어야 하는데, 사회진보연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면 부정하고 당운동을 부정했다. ‘사회운동’은 당적 운동도 아닌 자본주의 정치권력을 타파하고 체제변혁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 사회진보연대식 무정부주의 운동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맑스주의의 정수이자 혁명적 원칙을 모두 버린 사회진보연대에게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과학적 성격”이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알튀세르가 그랬던 것처럼, 윤소영은 쏘련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게 되었고, 윤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진보연대는 조선 같은 현실사회주의에 대해 중상하는 악명 높은 반북반공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오죽하면 파렴치한 조작을 일삼고 반공이데올로기로 악명 높은 극우파쇼신문 조선일보에서조차 사회진보연대를 적극 칭찬하고 나섰겠는가?

좌파단체인 ‘사회진보연대’는 18일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규탄하면서, 이번 사태의 책임이 미국이나 우리 내부에 있다는 북한 추종 태도를 비판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논평에서 연락사무소 파괴에 대해 “연락사무소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국가 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설치하는 일종의 외교공관”(이)라며 “폭파 같은 비상식적 처사는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며 북한 정권을 규탄했다…

사회진보연대는 국내 운동단체들이 대북추종 태도에 대해 “환상을 버리라”고 했다. 이들은 “한국의 사회운동은 현 사태를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과 한국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며 “북한의 행동에 알리바이를 주는 것은 결코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한 정권에 알리바이를 주는 남한 사회운동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한반도 민중 전부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며 “핵 개발은 동기도 반민중적이며, 그 결과도 파멸적”이라고 했다.(정우상 기자, “좌파단체 ‘운동권, 북에 대한 환상-맹목 버리자’”, 조선일보, 2020.06.19.)

‘좌파단체’임을 내세워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과 그 주구인 정권에 알리바이를 주는 사회진보연대의 “비상식적 처사는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사회진보연대의 황당무계한 반북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비판하지 않겠다. 이에 대한 전면비판은 “조선일보가 칭찬하는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좌파’들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가?”(전국노동자협회, 2020년 6월 26일)를 보기 바란다.

더욱이 다음 글은 사회진보연대의 “충격적인 정세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월 5일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 <2021년 정세전망>에는 ‘한반도 정세의 격화와 국내정치의 불안정’이라는 소제목 아래 사뭇 놀라운 내용이 들어갔다. 다음 문구다. “자력갱생, 핵무력 완성으로 맞서는 북한 – 북한은 8차 당대회를 통해 대북 적대정책의 철회 없이는 대화와 협상에 연연하지 않고 자력갱생으로 제재를 돌파하며 미국에 대해 선대선 강대강의 원칙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와 같은 서술에서는 북한의 핵무장이 한반도·동아시아 민중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1945년 이후 세계 진보세력 모두가 북핵을 포함하여 모든 핵무기의 불법화와 철폐를 이야기해왔다는 인식을 찾을 수 없다. 북한의 대화 거부와 핵 고수를 사실상 지지하고 이를 ‘자력갱생’ ‘강대강’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사회진보연대, “북한의 핵무기와 대남전쟁을 지지한다고? 민주노총 집행부와 자민통 세력의 충격적인 정세인식에 대하여”, 노동보다 | 2021.02.22.)

“북한의 대남 통일전쟁 준비를 옹호하는 ‘자민통’”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진보연대를 보노라면 과연 이들이 진보단체인지 파쇼 공안기구의 하부기구인지 착각하게 된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있는가? “한반도·동아시아 민중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미제국주의인가? 미제국주의의 고립말살책에 맞서는 북인가? 미제국주의의 대북적대정책 철회와 핵독점 패권 전략이 없다면 북핵이 있겠는가? 반대로 미제국주의의 대북적대정책 철회와 핵독점 전략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북핵이 사라지겠는가? 인과관계로 따지자면, 사회진보연대나 이런 식의 반동적 인식이 먼저 사라진다면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하루라도 빨리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사회진보연대의 정치적 타락상은 반제국주의 없는 반핵운동. 소부르주아 평화주의 단체의 정치적 종말을 잘 보여준다. 현실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진보’단체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악선전에 놀아나고 반공주의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파시즘과 파시즘을 격퇴했던 쏘련 사회주의를 그 본질이 같은 ‘전체주의’로 보는 알튀세르주의자들이나 유로코뮤니즘 같은 우경적 정치사조의 직접적 영향을 받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교조화를 토대로 한 스탈린주의와 일선을 긋는다”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달성한 민주주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그 숱한 왜곡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달성하였음을 우리는 확인한다”(황광우, 《다시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자들이 자본주의에 머리를 조아리고 투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반쏘주의는 반북주의로 전화(轉化)되었고, 반스탈린주의는 반김주의로 전화(轉化)되었다. 맑스주의를 개조하겠다며 맑스주의 전화 운운하던 자들은 도리어 반맑스주의로 전화되어 지배계급의 반동사상으로 개조 당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봤던 것처럼, 전국학생행진의 윤석렬 지지는 서구 소부르주아 정치사조들과 그 사조의 계승자, 그 계승자를 따라 전화된 모단체, 그 모단체가 낳은 학생단체들이 전화된 결과다. 반맑스주의는 그 역사적 전통을 따라 사상적 타락으로 일치단결된 무정부주의적 ‘일괴암주의'가 되었다.

극우학생행진으로 전화(轉化)한 전국학생행진의 정치적 파멸

모조직 사회진보연대가 조선일보의 찬사를 받았는데, 학생행진도 윤석렬을 지지한 입장문이 조선일보 기사(학생운동권 “윤석열 지지…진정한 좌파라면 이재명 못찍어”, 2021.11.05.)로 실리면서 극우 사이트 여기저기에 공유되고 유튜브에서도 뜨거운 관심과 찬사를 받으며 7만회 가까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당신이 진정한 좌파라면 정권교체를 위해 윤석열 후보 지지를 감수해야 하는 이유다”라며 극우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문도 그렇지만 다음 내용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이었던 소득주도성장론은 경제학에 미달하는 사이비이론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임금주도성장론의 변종으로, 경제성장의 요인인 자본축적과 기술 진보의 중요성을 부정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의 결과는 익히 알다시피 부정적이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자영업자의 소득이 하락하고 자영업 관련 일자리도 감소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심각한 사회 갈등을 낳았고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간 임금 격차를 확대시켰다.”([211105 입장문] “20대 대선, 좌파의 선택은 정권 교체여야 한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경제학적 사기다. 기존의 성장론과 대비되는 반(反)경제학이다”(중앙일보, 같은 기사)라며 윤소영 교수가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학생행진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론이 반(反)경제학이면 “기존의 성장론”은 정(正)경제학이란 말인가?

문재인 정부가 비판받는 것은 ‘소득주도 성장론’ 자체 때문이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이 임금주도 성장이라면 그것이 제대로 실현만 된다면 노동자의 생활향상에 도움이 된다. 최저임금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가 비판받는 것은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요구를 내걸었기 때문이 아니다. 변죽만 울리고 산입범위 확대로 약간의 최저임금인상을 무효로 되돌리고 결국은 최저로 최저임금 인상을 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에는 노동존중과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고 소득주도 성장을 외쳤다. 케인즈주의도 자본주의 불황이나 공황을 돌파하기 위해 유효수요 창출을 외치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 성장론이 실패했던 것은 자본주의에서 권력은 자본의 성장과 이윤보장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니라면 자본의 성장과 대중의 분배가 항상 대립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에 대한 최대한도의 착취와 대중의 빈곤을 통해 최대한의 성장을 추구한다. 노동자의 빈곤과 실업이 자본축적의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노동자 민중의 안정적인 삶은 자본과 권력의 관심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의 의지나 정책보다도 자본주의 공황과 저성장, 장기불황 같은 경제적 현실과 자본의 논리가 노동자를 희생시켜 자본의 성장에 매진하게 하는 객관적인 힘으로 작동했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놀라운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나 여전히 반기아상태의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 대중의 반기아적인 생활수준은 모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적이고 불가결한 조건이며, 그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대중의 반기아 상태와 빈곤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이라는 것이고,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위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 교수, 전문가들, 언론인들은 자본주의의 사악한 변호론자들로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은폐하고, 자본가들의 무한착취와 인민대중의 고통을 정당화하고 있다. 학생행진은 사악한 자본의 대변자들처럼, 소득주도 성장이 기존 부르주아 “경제학에 미달하”고, “경제성장의 요인인 자본축적과 기술 진보의 중요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사이비이론”이라며 자본가들을 변호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은 항상 자본의 축적에 비해 노동자의 고용을 줄이게끔 한다. 빈곤을 일상화 한다. 이것이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이고 ‘저임금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의 기술진보 역시 노동자들의 고용을 줄이고 노동강도를 강화한다는 사실은 맑스주의에 초보적인 이해만 있어도 알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자영업자의 소득이 하락하고 자영업 관련 일자리도 감소”하고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심각한 사회 갈등을 낳았고”,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간 임금 격차를 확대시켰다”는 주장에 이르면 학생행진이 ‘좌파’ 학생단체의 탈을 뒤집어쓰고 자본의 사악한 밀정 노릇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품게 될 정도다.

과연 행진은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이러한 입장문을 내게 됐을까?

사회보장은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그 불연속성, 분파화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사회보장은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전략으로서 근대적 자유주의인 것이고, 결국 노동권이 아니라 노동의 권리만을 인정함으로써 임노동 제약[constraint]을 완화하면서도 새로운 형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강동훈, 같은 글에서 윤소영 교수 주장 재인용)

 

윤소영 교수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 반대한다.

노동자들이 임노동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노동자들을 분열·경쟁시키는 자본가 계급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엄밀한 의미에서 주당 노동시간 단축)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거나 일부 노동자들이 혜택을 보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자본가들은 변형시간근로제를 도입하고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잔업과 특근 등을 시켜 그들의 임금을 올려줄망정 일자리를 늘리지는 않는다. 이는 노동계급의 단결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도 자본가들의 계급투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요구로서 노동자 운동이 잘못 채택하는 요구라고 윤소영 교수는 본다.(강동훈, 같은 글)

윤소영 교수는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요구가 “노동자들을 분열·경쟁시키는 자본가들의 계급투쟁”이라며 반대하는데, 학생행진도 이 주장을 따라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의 소득하락과 일자리를 감소시켜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을 분열·경쟁시키고 있다고 사고하는 것 같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 역시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간 임금 격차를 확대시”킴으로써 “심각한 사회 갈등을 낳”고, “노동자들을 분열·경쟁시키는 자본가들의 계급투쟁”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자본의 변호론자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은 기금처럼 제한돼 있기 때문에 특정 부문에서의 임금인상은 다른 부문에서의 임금삭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임금인상을 반대한다는 ‘임금기금제’를 주장했는데 그 주장을 연상시킨다. 법정 노동시간 단축이 전체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되기 때문에 원칙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주당 노동시간 단축이나 일부 사업장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이 쓸모없는 투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 삭감 없는, 인원감축 없는, 노동강도 강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투쟁이어야 하며 개별사업장에서 투쟁성과가 있다면 다른 사업장에서도 그 사례를 근거로 투쟁을 확산시켜 나갈 수 있다.

노동자계급 내부가 분열되는 것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이를 반대하는 정규직 일각의 이기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해치는 직접적인 원인을 간과하고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요구를 반대하는 윤소영 교수야말로 “노동자들을 분열·경쟁시키는 자본가 계급투쟁”에 포섭된 것이다. 사회보장도 반대하고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도 반대하는 윤소영 교수는 노동자들의 투쟁전반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진보적 교수를 자처하면서 곡학아세로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생행진의 인식 중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학생행진을 비판하는 사람, 세력들도 대개는 이들의 반북적 인식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행진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정책을 반대하는 이유를 보면 이들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윤석렬과 같은 철학과 정책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문재인 정권이 “북한에는 미국이 북한의 '핵동결'을 용인하고 경제 제재 완화를 해줄 거라는 헛된 믿음을 심어주었”다고 비판한다. “북미 관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북한이 핵능력을 강화하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SLBM 발사를 도발로 보지 않”고 “오히려 미국에 종전선언 합의를 요구하고 있”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대북 경제 제재를 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개별적 북한 관광을 허용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학생행진은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가 아니라 북한의 이익과 정부의 지지율을 기준으로 대외 정책을 펼친다. 이는 주변국의 불신을 낳고, 군사위기를 부추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로드맵이 없는 상황에서 체결된 종전선언, 완화된 경제 제재는 사실상 북핵과 독재체제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학생행진은 미제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적대시 정책을 폐기하지 않고 말로만 종전선언을 제안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로드맵이 없는” 상황에서 종전선언과 경제 제재 완화를 추진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하고 있다.

윤소영 교수와 사회진보연대의 사례를 따라, 학생행진은 남북문제, 분단문제에서 극우반동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던 학생행진은 자본의 사악한 변호론자, 제국주의의 주구, 반북반공주의를 외치는 극우학생행진으로 전화(轉化)되었다. 사회진보와 연대를 위해 극우적 학생단체의 광폭한 행진을 멈추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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