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 에이브람스가 쓰고 민플러스가 출판한 '끝나지 않은 전쟁 - 북미대결 70년사'를 읽다.

같은 민족인 북을 우리는 언제까지 적으로 보며 적대할 것인가.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미국은 정녕 우리의 편인가.

북미대결 70년사-끝나지 않은 전쟁.

- 해방 후 미군은 점령군으로 반도 이남에 등장했다. 미군정은,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결합하여 인민들의 지향을 담아 결성한 것으로 이미 전국 단위에서 행정과 치안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인민위원회를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해산시키고 대신에 일제 하에서 고급관료, 경찰, 만주군과 일본군의 장교로 근무했던 친일파를 내세워 남한을 간접 지배했다. 이는 인민들의 의사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것이라서 남 인민들이 거세게 저항했다. 대구 10월 민중항쟁, 제주 43민중항쟁, 여수반란사건...등이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 미군정은 소수 친일파를 내세워 인민들의 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1950년에 이르렀을 때 전직 일본군 장교들이 이끄는 정부군과 그들과 연계된 서북 청년당 등 우익 청년단체들이 살해한 남한 내 민간인 숫자는 10만 명, 당시 남한인의 2%에 달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보수적인 수치로서 2000년 초반에 나온 남한의 보고서들은 60만~120만 명 사이로 그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 수치를 보여준다. 1950년 초에 <뉴욕타임즈> 특파원 월터 설리반은 남쪽 코리아 거의 모든 곳이 “아마도 세계에서 전대미문일 공포의 먹구름으로 어두워졌다”고 썼다.

-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 어느 한 쪽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는 본질적인 사안이 아니다. 미군정이 들어와 남쪽의 인민위원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민족주의들과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때부터 실은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1944년부터 개전까지 38선에서 무수히 발생된 교전 중 먼저 공격했던 측은 거의 남쪽이었다.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본 측은 미국이었다. 2차 대전을 치루면서 급팽창된 군수산업이 판로를 잃어 미국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의 미국경제는 또 하나의 굵직한 전쟁을 갈망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경제의 불황을 일거에 해결했다. 일반적으로 이득을 보는 자가 일을 벌이는 법이다.

-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약 2주일이면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3년에 걸친 대학살극으로 되었다. 미국과 남한의 인명 손실도 컸지만 북에서는 총 인구의 거의 30%의 사상자가 났다. 북은 소총과 얼마 얼마 안 되는 탱크 정도의 화력이었지만 당시의 미국은 세계 50%를 넘는 GNP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2차 대전을 경험한 노련한 병사들, 수백 척의 전함과 항공모함, 수천 대의 전폭기, 폭격기, 게다가 원자탄까지 갖추고 있었다. 미군 휘하의 병력과 화력은 북을 압도했다. 미국은 총력전을 펼쳤다. 그래도 결국 미국은 북을 이기지 못했다.

- 개전 후 1년이 지나고 나서부터 전선은 38선 부근으로 고착되었다. 신생국 북과 중국에겐 밀고 내려올 보급과 화력이 없었고 미국과 그 연합세력은 북의 지하화된 방어선을 뚫고 밀고 올라갈 때 예상되는 엄청난 병력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정전 논의가 시작되었다.

- 중국과 북은 가능하면 빨리 정전하고 싶어했다. 화력이 열세였고 무엇보다 일방적으로 제공권 장악한 미 공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인해 인명피해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격받지 않는 안전거리에서 북 전역을 마음대로 폭격할 수 있었던 미국은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휴전을 늦췄다.

- 미 공군의 폭격은 남북을 가리지 않았다. 미 공군은 전선 이북의 모든 한국인들을 적으로 여겨 공습으로 폭격하고 기관총으로 살해했다. 노근리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은 그들 말대로 대한민국 민중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까. 그들이 남북 불문한 한국 사람들을 마치 짐승 사냥하듯 대한 사례들을 보면 그들은 다만 이 땅을 일본에 승리한 전리품으로 여겼을 뿐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체제를 이 땅에 폭력적으로 이식하기 위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게 된다.

- 정전회담에서 가장 큰 이견은 포로교환 조건에 대한 것이었다. 훨씬 더 많은 북과 중국군 포로를 거제도에 가둬 놓은 미국은 포로들에게 북이나 중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남과 대만으로 갈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려 했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과 대만으로 가려는 포로가 많을수록 공산국가에 대한 ‘자유세계’의 이념적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로 하여금 남쪽과 대만을 선택하게 하려는 폭력적 공작이 난무했다. 무수한 포로들이 거제도 수용소에서 살해되고 불구로 되었으며 의학 실험 혹은 수술 대상자로 되어 희생되었다. 반면 북에 있던 미군 포로들은 충분히 먹고 쉬며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결국 미국의 입장이 관철되어 정전회담이 조인되었다. 미공군의 잔혹한 폭격으로 인한 인명피해와 핵공격 위협을 북과 중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전쟁을 겪으며 북은 자신의 공격 가능 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안전한 곳에서 가해지는 폭격 특히 핵공격 가능성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후 거의 모든 군사자원들과 산업시설들을 폭격과 핵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지하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지금 북의 핵심적인 산업시설과 군사자산은 모두 지하에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촘촘하고 강력한 대공망을 건설했다.

- 정전되었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형태의 전쟁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 정전 후 비무장 지역에서 미군과의 무수한 교전이 있었다. 북은 1968년에 미국 최첨단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고 이듬해엔 EC121 정찰기를 격추했다. 휴전선을 넘어간 미군 헬기가 격추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의하면)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 F-4전폭기도 수 대 격추되었다. 판문점에서 일어난 미류나무 벌목사건에서도 그러했듯 북은 미국과의 접전에서 한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미국은 핵공격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 미국과의 대결이 한반도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미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항거하는 세력(자주진영)과의 갈등이 있는 곳이면 북은 어디든지 미국의 반대편에 참가하여 미국에 맞섰다. 북은 이집트, 월남, 시리아, 이란, 쿠바, 리비아, 앙골라, 남부 레바논 등에 전투원이나 군사고문단을 보내고 고성능의 전투장비, 기술, 부품...등을 지원하면서 미국의 기도를 종종 좌절시켰다.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북미간에 벌어진 일종의 대리전이다. 미국에게 북은 70년 이상 대립해 온 숙적인 셈이다.

- 1990년대 전후해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었다. 북은 중요한 무역상대국들을 잃었다. 소련이라는 강력한 지원세력을 잃으면서 북은 혼자 힘으로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선 미국에 맞서야 했다. 에너지 공급선이 끊겼다. 일찍이 없었던 홍수,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겹치고 미국이 중심으로 된 서방세력이 가혹한 제재를 가하며 목을 졸랐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북이 곧 붕괴될 것이라 확신했다.

- 북은 선군정치 노선으로 고난의 행군을 돌파했다. 경제가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북은 자국의 정권을 붕괴시키고 서방이 선호하는 체제로 재편하겠다는 미국의 적대적 의도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북은 핵 공격도 불사하는 미국에 대항하여 장거리 미사일 투발능력을 늘리고 핵무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의 핵 능력이 커지기 전에 그걸 제거하기 위해 여러 번 핵공격을 포함한 다양한 공격을 검토했으나 북의 군사적 능력과 단호한 항전의지에 대한 두려움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묶인 군사력의 한계 등이 원인이 되어 군사적 공격을 결행하지 못했다. 미국은 북의 핵능력 제거하기 위한, 핵공격을 수반하는 군사적 공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될 한반도에서의 대량 살상 참화의 가능성을 미국 본토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간단하게 무시했다. 그들에게는 다만 본토의 안전만이 중요했던 것이다.

- 북은 핵실험을 거듭하며 마침내 각종의 원자탄, 수소탄 개발을 완성했다. 여러 용도 다양한 사거리의 로켓들을 개발하여 급기야 괌, 미국 서부 그리고 미국 전역을 사정거리로 하는 첨단의 ICBM, SLBM까지 개발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최첨단의 대공, 대함 미사일들과 한반도 전역을 사정거리로 하는 전술미사일까지 개발하여 한국에 주둔한 미군기지들을 타격권 안에 두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안전한 거리에서 마음 놓고 상대를 박살내던 미국의 군사적 이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북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선택지는 현실적으로 없어지게 된 셈이다. 미군의 전략자산으로 기능해 오던 항공모함들과 최첨단 폭격기들도 더 이상 사용가능한 공격수단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이런 사정이 북의 김정은과 미국 트럼프의 일대일 회담이 성사된 배경이다.

-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선택지가 없어진 조건에서 미국과 서방은 북의 내부로 파고들어 내부로부터의 이반을 획책, 내파(內破)를 도모하였으나 리비아,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의 사례와는 달리 그럴만한 틈을 찾지 못했다. 그런 나라들에서는 적대적 의도에서 출발하는 왜곡된 정보전에 해당국의 인민들이 쉽게 동요했던 것이다. 북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지속적으로 저락시켜 정권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하고 반란을 도모하게 하려던 시도로 불발도 끝났다. 미증유의 극단적인 제재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북은 꾸준히 경제를 성장시키고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어 왔기 때문이다. 해커를 통한 정보전으로 북의 군비(軍備)를 교란시키려는 정보전도 실패했다. 그리하여 북에 적대하는 서방에서는 북을 일러 ‘정보의 블랙홀’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 북의 지도부로부터 인민들을 이반시켜 그들의 체제를 내파(內破)하려 했던 미국의 시도는 왜 실패했는가. 식민지 고통 당하면서 단행했던 민족해방 무장투쟁과 한국전쟁에 대한 뼈저린 경험에 기인한다. 다시는 예속당하지 않겠다는 저항정신을 인민들이 공유하고 한국전 당시 미국이 북의 인민들에 가한 비인간적 대량 학살행위들을 그들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앞으로의 북에 대해 저자는 어떻게 예상하는가 들어보자. “북한은 서방세계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절에 가장 극단적인 압박을 견디고 살아 남았고 핵을 탑재한 ICBM을 개발함으로써 2017년부터 공격의 위협을 상당히 감소시켰다. 이제 적들이 계속 쇠퇴하고 세계 경제와 세계 질서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서 비서방 국가들의 역할이 갈수록 두드러지면서 북한의 경제와 안보상황은 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 274쪽. 9

- 북과 미국 사이 대결의 역사가 75년을 넘었다. 그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열전은 3년으로 끝났지만 양자 간의 치열한 전쟁은 양상을 달리 하면서 75년 이상을 이어 온 것이다. 북은 전쟁 상대를 미국으로 본다. 미국은 북을 정권을 바꾸고 체제를 전복하여 자신이 선호하는 체제로 바꿔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한편 미국과 동맹관계로 묶인 한국은 북을 주적으로 간주한다. 한번은 물어야 한다. 같은 민족인 북을 우리는 언제까지 적으로 보며 적대할 것인가.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미국은 정녕 우리의 편인가. 북에 대한 핵 공격시 수반되는 남쪽의 대량참사의 가능성을, 미국 본토에서 대량 사망이 발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간단히 무시했던 미국의 태도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때도 미 공군의 비행기들은 남과 북의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피난민들 머리 위로 폭탄을 떨구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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